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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주말특간 2026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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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니소니 조회 81회 작성일26-08-1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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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들어서니 음력설이 다가온다. 절강서부 산간 지역의 여동촌에서는 집집마다 명절 준비에 바쁘다. 이른 아침 정량은 텃밭에 나가 김치를 담글 무를 뽑고 있다. 텃밭은 작지만 여섯 일곱 가지 채소를 심을 수 있어 일가족이 먹을 양으로는 충분하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농민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다.

호미를 내려놓고 부설된 여동촌민들은 풍요한 삶을 화폭에 정성껏 담아냈다. 강남 가옥의 운치와 절강서부 산수의 수려함이 어우러진 여동촌의 아름다운 향촌 풍경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곳에서 회화는 사람들의 삶의 일부분이다. 현재 800여 명이 사는 이 마을에서 농민 화가가 300여 명에 달하는데, 그중 열 명은 중국 미술가 협회 혹은 절강성 미술가 협회 회원이다. 여동촌도 인근의 이름난 예술촌으로 되었다.

이날 여동촌 촌민들은 사당에 모여 용등 제작을 상의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용등춤을 추는 것은 현지에서 전해 내려온 전통 습속이다. 지금은 설을 쇠러 오거나 용등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장인이 많은 여동촌에서는 용등 제작에 많은 정력을 기울이고 있다. 60여 년 경력을 자랑하는 76세의 여통선 노인, 명절용 용등을 제작하는 것이 자연스레 그의 몫으로 되었다.

여통선은 집안의 제4대 축시공으로서 어릴 때부터 기술을 배웠다. 그의 기억 속에서 어린 시절의 고향은 매우 가난했다. 절강성 구조시 가성구 국향에 위치한 여동촌은 구조 시내에서 18km 떨어져 있다. 이곳은 산이 많고 땅이 적어 여러 가구가 고작 600무의 경작지를 다루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산간의 모래 땅이라 소출이 낮아 많은 촌민들은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서 기술을 배웠다. 마을에는 축시공뿐만 아니라 목수와 미장이 많았다.

절강서부 산간 지역은 대나무가 풍부하다. 사람들은 시루나 치 그리고 닭장과 어롱 등을 모두 축시공의 손을 빌려 만들었다. 대나무 공예는 정밀한 작업이었다. 여통선은 지금도 돗자리 한 장을 부친이 한 달 넘게 엮던 것을 기억하곤 했다. 더 편안하고 매끄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부친에게서 기술을 배울 때 평범한 바구니 제작조차 엄격한 검사를 거쳐야 했다. 장인의 정성이 깃든 대나무 공예품은 정교함의 결정체였다.

대나무 공예는 간단해 보이지만 제대로 해내기는 쉽지 않다. 여통선이 보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엮는 작업이 아니라 대나무 뜨기이다. 단단한 대나무를 굵기가 일정한 대나무 오리로 깎아내기 위해 그는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이젠 그가 깎아낸 대나무 오리는 머리카락처럼 가늘 정도다. 이런 재료가 있으면 축시공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 모든 것을 엮어낼 수 있다. 수십 년 전 가난했던 시절 여동촌 사람들은 장인 정신과 솜씨로 생활 필수품들을 만들었다. 살아가는 기술 하나가 금은보화보다 낫다는 말처럼 갈고닦은 솜씨 덕분에 촌민들은 점차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근 촌민은 원래 부친을 따라 목수 일을 배웠다. 1970년대 현 문화관에서 만화와 회화 강습을 조직하자 진취심이 강한 정근도 수업을 들으러 갔다. 하지만 그 수업이 인생을 바꿔 놓으면서 그는 여동촌의 첫 화가로 되었다. 정근은 한번 마을에 벽화를 그렸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 일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점의 큰 그림이 이처럼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로부터 정근은 그림에 푹 빠졌고 그의 영향으로 여동촌에는 붓을 드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회화는 촌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방식으로 되었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는 감귤이 대량으로 출시되는 계절이다. 양근령은 수십 고루 귤나무에서 수천 근의 감귤을 수확하곤 했다. 구조는 중국의 주요한 감귤 생산지 중 하나이다. 1990년대 잘 살기 위해 촌민들은 경제적 가치가 더 높은 귤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처음 몇 년간은 수입이 짭짤해 양근령도 돈을 좀 벌었다. 그는 또 6만 원을 빌려서 3층짜리 가옥을 지었다.

하지만 집이 완공되기 전에 갑작스레 닥친 서리로 나무에 달린 귤이 모두 얼어버렸으며 마음도 얼어붙었다. 재해를 입은 것은 양근령뿐만이 아니었다. 한파 피해로 여동촌의 귤나무가 거의 다 얼어 죽었다. 귤나무는 심어서 열매를 맺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당장 다시 심는다 해도 앞으로 3년간은 수입이 없어 촌민들은 또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겨우 꽃피기 시작했던 삶은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새 집을 지느라 빌린 돈도 갚지 못한 데다가 일가족의 생계조차 막막해졌다. 당시 양근령은 빚 갚을 능력이 없어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했다.

2003년 향에서 서기원으로 일하던 정리민은 양근령이 빚을 갚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방문을 통해 정리민은 회화를 무척 좋아하는 양근령이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침대 머리에 엎드려 그림을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회화를 좋아하는 정리민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동촌에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많으니 농민화 협회를 조직하면 서로 교류하고 학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촌민들의 수익 창출 경로도 넓힐 수 있었다.

공동의 노력으로 2003년 여동 농민화 협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회원이 겨우 10여 명이었지만 협회는 생기로 넘쳤다. 정리민의 요청으로 협회에 가입한 양근령은 뛰어난 실력으로 늘 칭찬을 받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격려로 양근령은 삶에 대한 신심을 되찾았다. 감귤 재배원은 조금씩 생기를 회복했고 그림 실력도 교류를 통해 나날이 향상했다. 마침내 풍작을 거둔 양근령은 빚을 다 갚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촌민들은 정기적으로 당지부 서기 집에 모이곤 한다. 여동 농민화 협회 설립 초기 자금 부족으로 당지부 서기는 자기 집 북쪽 방을 내서 화실로 쓰게 했다. 당시 조건이 초라했지만 열정은 매우 높았다. 촌민들도 수시로 구경하러 와서 마당은 늘 북적였다. 그 후 부근에서 사생을 하던 중국 미술학원의 학생들도 소문을 듣고 이 산골 마을의 농민 화가들을 찾아왔다. 대학생들과의 대결로 여동 농민화의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회원도 300명으로 늘어났다.

현 정부의 지지로 협회는 좁은 마당에서 널찍한 문화 창작 센터로 옮겼고 촌민들은 드디어 전문 책상과 도구를 갖게 되었다. 여건이 좋아진 것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여통덕이었다. 그는 마을의 1세대 화공이었지만 중간에 4~5년 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당시 마을에서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많았다. 그 후 협회에 가입한 여통덕은 다시 붓을 잡았는데, 2005년 처음으로 구조시 미술전에 참가해 이등상을 획득했다. 취미로만 여기던 데서 수입이 나올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여통덕의 아내도 태도가 바뀌었다.

화예가 정진하면서 여동촌 농민 화가들은 고향을 벗어나 시와 성급 대회를 거쳐 전국으로 진출했다. 세상이 넓어지고 호주머니도 두둑해졌다. 마침 절강성에서 천만 공정이 추진되던 시기라 마을마다 아름다운 농촌 건설이 일면서 주변 농민 화가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여동촌의 농민 화가들은 해마다 벽화 작업으로 10만 원(위안)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오랜 세월에 많은 물음 남겼네. 향수는 맑은 물, 향수는 단전수, 향수는 빛을, 향수는 깊은 점. 세월 가면 단양도 전등 고향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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