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툴골사람-중(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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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 43회 작성일26-08-11 13:43본문
엄한규의 행방은 한해가 다 지나서야 알려졌다. 청진에 갔던 춘영의 오빠가 술집에서 일하는 한규를 보았다는것이다.
이 소식은 마을사람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글쎄 가박힌다는것이 술집이라니 사람되긴 싹수가 글렀다.》 아버지는 온 하루밤 자지도 못했다. 그런 어느날 숱한 순사들이 골안에 쓸어들어 온 동네를 발칵 뒤지며 한규를 찾았다. 한규가 강도질을 하고 술집녀자까지 꿰차고 도망질을 쳤다는것이였다. 왜놈들 말이라면 덮어놓고 도리질하는 마을사람들이였건만 이번만은 기웃하게 되였다.
《끝내 신세를 그르쳤구나.》 우리 집에서는 이때부터 엄한규에 대한 말을 일체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데려다 길렀던것까지 후회막심해하였다. 그런데 광복된 해 가을 뜻밖에도 엄한규가 우리 골안에 나타났다. 그것도 홀몸이 아니라 얼굴도 희고 손도 흰 《하이칼라》녀자를 데리고 찾아든것이다.
동네 개란 개는 다 떨쳐나 짖어댔다. 베옷 하나로 일년 사시절을 지내는 골안사람들과는 너무나 유표한 차림때문인것이였다.
한규는 맥고모에 밤색골덴양복차림이였고 이 고장 녀인들의 눈이 휘돌아갈 정도로 예쁜 녀자는 초록비단치마에 흰 모본단저고리를 입고있었다. 한규때문에 문밖에 나왔던 녀인들은 도회녀자의 요란스러운 차림에 기가 질린듯 도로 들어가 경멸과 시샘이 섞인 눈길을 문창호지구멍에 대고 점도록 보았다. 도회지녀인은 몸차림에 알맞추 조그마한 보따리를 하나 이였고 한규는 커다란 궤짝 두개를 질빵으로 동여지였다. 그는 곧바로 우리 집을 겨눠 찾아들었다. 도회지생활탓인지 그의 얼굴은 이전의 적동색이 아니라 배추속대처럼 허옇게 피기를 잃고있었다. 그러나 그 기상이란 수만외적을 쳐물리치고 온 개선장수와 같았다. 우리는 처음에 그를 어떻게 맞았으면 좋을지 당황했다. 《… 강도질을 하고… 술집녀자를 꿰차고…》 하는 불쾌스러운 과거와 그 사실을 반증하듯 하는 도회녀자의 출현은 무작정 솟구쳐나가려는 반가움을 억제했다. 《그러나저러나 우릴 믿고 찾아왔는데…》 하는 아버지의 말이 모든것을 결정하였다. 한규의 험악스런 과거는 모르쇠를 하기로 타합이 되였다.
한규가 가지고 온 재산이란 옷가지 몇벌에 이불과 그릇따위들이였는데 거기엔 우리 어머니에게 해오는 모본단치마저고리 한벌과 아버지며 동리어른들께 대접하려고 장만했다는 되들이술 2병이 있었다.
그날 저녁 동네어른들 거의가 한규를 찾아보러 왔다. 어쨌든 이 마을에 있으며 정을 붙였던 사람이 아닌가. 한규는 도회에서 살았으나 예전의 례법은 어기지 않고 오는이마다 문전에서 맞아 무릎절을 하였다. 색다른 녀자를(분명히 술집 논다니였을) 차고왔다는데로부터 미리부터 이마살을 찌프리고 들어서던 로인들도 눈물이 그렁해 무릎절을 하는 한규를 보고는 얼마간 숙부드러워들 졌다. 한규가 지고온 짐속에서 축음기인지 뭔지를 꺼내놓지 않고 얌전스레 묻는데나 대꾸하고 과거의 《허물》을 툭 빠개놓았다면 모든데 대해서 널리 《용서》를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규는 자기의 《강도》건이나 데리고온 녀자에 대해 털어놓고 《회개》할 대신 축음기를 틀어놓고 《가르치러》 드는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아니, 어째서 여긴 쪼끔도 달라진것이 없수꾸마, 광복이 됐으니 우리 세상 아니꾸마. 이젠 다들 노래랑 부르며 즐겁게 살아야 하우다.》
그는 더없이 장한 일을 하는양 두눈이 거스름해서 축음기태엽돌리개를 슬슬 돌리며 여기 싱긋, 저기 벙긋 웃어보였다. 축음기판이 련속 바뀌며 돌아가자 무슨 《맹꽁이타령》, 《날 다려가소》, 《울산타령》이요가 거들먹지게 흘러나왔다. 어깨가 들먹거릴 정도였다. 국수를 누르느라 부엌에서 서성대던 아낙네들까지 눈에 《바람기》가 일어 올라왔다. 그러나 엄한 표정을 짓고 댕댕해 앉아있는 동네좌상들의 시쁘둥한 기색을 보고는 자기네도 별로 흥심이 없다는듯 되돌아나갔다. 눈치없이 좋아하는것은 아이들뿐이 였다.
한규는 아이들덕에 몇판 더 돌리고는 축음기뚜껑을 닫았다.
《…다들 좋아했는데…》
우리 골안사람들은 비록 배운것은 없어도 례절과 도리는 아는 사람들이여서 한규가 먼저 까밝히지 않는한 그의 께름한 전 생활을 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로 이러저러한 억측과 꾸며진 말들이 이입저입을 통해 온 마을에 나돌았다. 한규는 술집에서 웃음 팔고 몸파는 녀자와 정분이 나 강도질까지 했고 그 덕에 가막소(감옥)를 나왔다, 광복바람에 가막소에서 풀려나온 그는 몸파는 일을 할수 없게 되여 한지에 나앉은 녀자를 꿰차고 살데 없으니 이 골안으로 찾아들었다… 하고. 특히 녀인들의 입심이 심했다. 이 고장녀인들은 인정에 무르고 어질었지만 그 입심들이란 여간 아니였다. 더구나 일생 비단옷 한벌 못 입고 살면서도 그 깨끗한 마음과 결백을 보물처럼 안고 살아가는 그네들에게는 《이 남자, 저 남자 마구 곁들인 녀자》에 대해서는 같은 녀성으로서의 분격과 수치를 느끼며 멸시하였고 자기들의 거치른 손과 얼굴과는 판이하게 고운 분결 같은 살을 두고 시샘과 질투까지 느꼈으니 말끝마다 가시가 섞여있었다. 그런데 마을에서의 이런 뒤시비를 본인당자는 전혀 모르고있었다는것이다. 딱한 일이였다. 생각 같아서는 그전 일들을 툭 빠개놓고 물어보고싶었지만 남의 상처를 꼬집는듯 싶어 주저되였고 또 그럴 틈도 없었다. 마당질과 겨울나이화목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속에서 한규 역시 우리 집 마당질로부터 손포가 모자라는 집일을 돕느라 뛰여다니다나니 끼니때에나 얼핏 마주 볼뿐이였다.
그가 우리 집에 와 며칠을 지낸 뒤 앞으로의 거처를 어데 정하는가 하는 문제로 마을어른들 몇이 와서 의논이 붙었다. 모두가 장주사의 사랑채가 비였으니(장주사는 광복되는 날 밤 행랑머슴만을 남기고 솔가도주를 했었다.) 림시변통으로 엄한규내외를 거기서 살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엄한규가 거절했다.
《안되우꾸마. 거긴 공산당위원회를 꾸릴 자리로 그냥 둬야 되꾸마.》
공산당이라니, 모든 사람들의 눈이 떼꾼해졌다. 읍에서랑 무슨 혁명자들이 공산당을 조직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까막산골바우들이 있는 화전골에 공산당이 선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걸 내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이 엄한규라는데서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학교란 문턱조차 밟지 못했지만 세상사에는 자못 밝다고 생각하는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어른들은 뻐꾹소리도 못하고 그의 입만 지켜 보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한규는 견마잡힌 생원님격으로 조를 뺐다.
《참, 아주바이들두… 정말 맥혔수꾸마.》 하는 말로 시작된 그의 공산당해설의 골자인즉은… 공산당은 제일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활빈당》 비슷한것인데 왜놈이나 장주사따위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죄다 들어야 한다. 김일성장군님께서두 공산당편이시다.…
어허, 장군님께서 공산당이라, 그러면 공산당이 돼야 하고말고. 소동축들은 물론 로인들이 더 들고 나섰다. 한규의 거처문제는 마당질 뒤거둠이 끝나는 차례로 집을 짓는다는것으로 일단락을 보고 공산당조직문제로 의논을 펼치던 끝에 다음날 나랑 몇사람해서 군에 가 알아보기로 했다. 군에는 벌써 공산당이 조직돼있었다. 군당비서가 우리를 만나 공산당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돌아가는 길에 젊은 지도원(부원) 한사람을 딸려보냈다. 그 지도원은 마을의 좌상들로부터 우리 같은 소동축까지 거의 전부를 만나 담화를 한 끝에 일곱사람으로 이 골안의 첫 당세포를 꾸렸다. 나까지 포함되였다는데서 좀 어색하긴 하지만 이 일곱사람은 우리 골안에서 그 누구의 말밥에도 오르지 않을만치 성실하고 뚜글뚜글한 농군들이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엄한규는 당에 들지 못했다. 다들 그의 께적지근한 과거를 두고 머리를 저었기때문이다. 그를 보기가 딱했다. 여하튼 공산당조직을 설도한것이 그가 아닌가. 그러나 공산당에는 아무 사람이나 드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온 마을이 알고 있는 때라 어쩌는수가 없었다. 다행히 한규는 별로 타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첫 당세포모임을 우리 집 웃방에서 했는데 한규는 온종일 장작을 패였다. 온통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이 뻘겋게 질린 한규는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우리들께 벙그레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한규네 집은 노루막치기 삼굿터에 지었다. 닷새동안에 온 마을이 달라붙어 달구질을 하고 재목을 마르고 벽을 쌓고 하여 3칸짜리 집을 얼싸하게 세워 놓았다. 우리 동리인심은 이런데서 나타났다. 아낙네들까지 다 떨쳐나 찰흙을 이긴다, 서까래를 다듬는다 분주탕을 피웠다. 한규네가 비록 옷차림은 뜨르르하게 하고 왔지만 피쌀 한말 없다는것을 아는 아낙네들은 좁쌀이면 좁쌀, 감자면 감자를 바가지에, 함지에 담아 저저마다 가져왔다. 그런데는 이 《도고한》 촌부녀들이 《술집기생》과 인사수작이 싫어 황황히 구들에 쏟아놓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는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 며칠 엄한규는 내처 말이 없었다. 약간 넋이 빠진듯 한 기색으로 여기저기 일에 삐쳐들다가는 멍하니 무슨 생각에 잠기군 하였다.
안해라는 녀자 역시 그랬다. 꿩의 깃털같이 아롱거리는 치마저고리를 입은채 이영짚을 만들어 올리기도 하고 저쪽에서 부뚜막매질흙을 찾으면 그 가냘픈 손으로 흙반죽을 싸들고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러나 그 열성이 허탕을 볼 때가 많았다. 부뚜막매질흙을 가져간다는것이 짚이 섞인 지붕흙을 가져가고 지붕흙을 나른다는것이 부뚜막매질흙을 가져가는 판이였다.
《이녁은 그만두라구.》
로인들이 말릴 때까지 녀인은 어쩔바를 모르며 이렇게 일판의 여기저기에 보람없이 뛰여다녔다. 동리부조가 연신 들어올 때는 방구석에 쪼그리고앉아 울기만 했다.
《집들이잔치》를 요란스럽게 했다.
아버지는 집에 하나밖에 없던 돼지를 잡게 했고 이미전에 부조낟알들을 가지고왔던 마을녀인들까지 좁쌀떡이며 감자지짐 같은것을 해가지고 왔다.
큰상앞에 한규부처를 나란히 앉힌 아버지는 한규가 가지고온 되들이병술을 동리어른들께 한잔씩 붓게 하는것으로 식을 떼였다. 그러고보면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이날을 예견한셈이였다.
술이 한순배 돌자 아버지가 거나한 목소리로 입을 떼였다.
《한규, 이 사람, 우리 죄가 막심하네. 소년에 이 골안으로 와 우리한테 정붙여 의지하고 살려 했네만 다 같은 망국노신세라 끝까지 돌봐줌이 부족해 험한 길을 걷게 했어. 일인즉 정말 안됐네만 이제 와서 과거지사를 더 따져 뭘하겠나. 오늘의 이 자리를 환도길로 삼으세나. 그리구 여기 들까부는 아낙들이 임자네 대해 뻐꾸기소리가 많네만 이제부턴 더 없을것으루 아네. 다 나쁜 세상 산탓이 아닌가. 그러니 새댁도 이걸 알구 우리 골안붙이들을 혈육으로 삼아 잘 살아봅세나. 자, 그런 뜻에서 임자두 들게.》
아버지는 한규가 가져온 술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머루와 다래로 담근 발효주를 한바가지 푹 떠서 내밀었다. 한규는 무릎을 꿇은채 두손 받쳐 바가지를 들고 갱생의 결심을 보일듯이 단숨에 밑굽까지 비워 버렸다. 화주는 아니여도 이 술은 몸에 즉시 피는것이여서 한규의 얼굴은 대번에 오지독이 되였다. 벌거우리한 볼에 눈물이 맺혀 번들거렸다. 아버지는 대견스럽게 머리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작은 보시기에다 술을 담아 한규의 처에게 권했다. 모두의 눈이 《놀아난》 녀인의 술마시는 모양을 호기심넘쳐 보았다. 그때의 상식으로는 술집녀자들이란 남자들 못지 않는 술고래라는때문이였다.
뿌직뿌직 타는 겨릅등밑에서 계월이라고 하는 녀자의 동그스름한가 하면 네모져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 밀랍처럼 해쓱한 빛을 띠였다.
그 순간 방안에는 숨소리조차 꺼진듯 했다. 하지만 인차 실망어린 한숨이 새여나왔다. 한규의 처는 보시기에 입술만을 대였다가 떼였을뿐이였다.
《에그, 역기도(꾀바르다) 하지비. 여기선 제법 내우를 하는구만.》
어느 구석에선가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모두가 술에 거나해지고 밤도 깊어 파장이 될녘에 갑자기 한규가 벌떡 일어섰다.
《아부님들, 아재들, 고맙수꾸마. 제… 이 신셀 잊지 않겠수꾸마. 정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술기운으로 떠들썩하던 방안이 삽시에 조용해졌다. 손등으로 눈굽을 뻑 닦고난 한규는 앞옷자락을 자꾸 비트는데 굵직한 목의 울대뼈가 오르내리는것이 애처로울 지경이였다. 그가 다시 입을 떼였을 때 목소리는 울음져있었다.
《한데… 아부님들… 아재들… 우리 저 사람은 나쁜 계집이… 기생이… 아니꾸마. 정말이꾸마. 정말!》
그리고는 풀썩 물앉았다. 그때까지 고개를 짓숙이고있던 한규의 처 계월은 《흑》 하는 소리와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싸쥔채 연한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고장에는 지꿎은 봉건이 있어 녀인들이 웃어른들앞에서 우는것은 도덕머리가 없는것으로 비난받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좌석에서는 누구도 그런 티를 보이지 않았다.
꼽새령감이 계월에게 다가가 어깨를 쓸어주었다.
《새애기, 울지 말라구. 임자 스나말이 옳네. 암, 그렇구 말구.》
꼽새령감의 눈굽도 붉어졌고 우리 아버지나 다른 어른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그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이날 밤의 일로 하여 한규처에 대한 뒤소리는 가신듯이 없어졌다. 마당질과 겨울나이차비까지 다 끝나게 되자 그를 찾아오는 녀인들이 많아졌다. 마을어른들속에서는 그 새애기(새각시)의 인사례절을 본 받으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이듬해 토지개혁때에는 마을어른들의 일치한 주장밑에 이 골안에서 일등가는 노란자위인 장주사의 약초밭과 새로 일군 화전을 한규네가 부치도록 했다.
파종때가 가관이였다.
겨우내 삼실을 잣고 베짜는 법을 배우느라 시종 방에 있어서인지 이 골안에 올 때보다 얼굴이 더욱 희여진 계월이가 머리수건을 푹 눌러쓰고 밭에 나서자 온 마을녀인들이 저마끔 그의 선생노릇을 하였다. 조씨는 어떻게 뿌리고 감자씨는 요렇게 묻고… 억대우 같은 한규가 밭갈이를 먼저 끝낸데도 있지만 인정 많은 녀인들의 도움으로 이해 파종은 그들이 제일먼저 끝냈다.
한규는 힘이, 계월은 이악이 발발했다. 동네 《빚》을 갚겠다고 늘 밭에 나와 살았다. 달이 있을 때는 밤에도 나와 후치질과 호미질을 했는데 계월이도 꼭꼭 따라나서군 했다. 둘사이의 금슬이 대단히 좋았다. 일하다말고 둘이 나란히 앉아 땀을 들이는것을 볼 때면 막 부러워날 지경이였다. 놀라운것은 술집녀자로 살았다는 계월이가 농사일에 매우 쉽게 익숙된것이였다. 한여름이 지나자 그의 손과 얼굴도 이 고장녀인들 진배없이 까맣게 탔으며 일솜씨도 벌찼다. 호미질 몇번에 손바닥이 터져나가던 녀자가 진거름을 주물고 한함지 넘는 거름을 이고 산비탈로 씽씽 오르내렸다. 한해도 채 안되는 사이에 계월은 완전한 까툴골사람이 되였던것이다. 뿐만아니라 모든 녀인들이 한규의 처라면 오금을 못 쓸 정도로 정을 붙였다.
녀자가 인물이 고운데다가 성정이 유순하면서도 싹싹했다. 혼자 있을 때면 호수 같은 눈에 침침한 그늘 같은것이 어려있어 접근하기 어렵지만 녀인들속에 있을 때면 고요한 호수 같은 눈에서 웃음의 불꽃이 방긋거리고 까르르 터치는 웃음은 성난 사람의 얼굴마저 밝게 할 정도로 발랄하고 정겨웠다. 특히나 음식솜씨가 뛰여난것으로 마을집 대사때마다 불리워갔다.
첫해 가을을 하고 탈곡을 끝마쳤을 때 우리는 모두가 부자가 될수 있다는것을 알았다. 현물세를 바치고도 한해 반 여분의 량곡이 남았던것이다.
한규의 처가 처음 나타났을 때 이 골안녀인들의 가슴을 긁었던 비단옷들이 늘어나고 그 옷들을 차려 입고 한규네의 축음기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법이 새로 생겨났다. 나날이 웃음과 노래속에 한해가 저무는 어느날 황해도의 한 농민이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에 고마움을 아뢰이며 애국미를 헌납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날 저녁으로 우리 집은 동리어른들의 《회의장》이 되였다.
《우리 골사람들이 제일 곧은 백성이라구 하지만 다들 개나발일세. 백성으로 말하면-》
이렇게 운을 뗀 서당집할아버지의 불충불효에 대한 지탄과 저마끔의 《자기비판》들이 있었다. 하지만 먹고 남을 량곡들을 거의다 옷이요, 그릇이요에 써버린통에 다음해로 미루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토방턱에 주저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규는 동리어른들을 바래주러 나온 나의 손목을 느닷없이 잡아쥐고 뜻밖의 질문을 들이댔다.
《동생, 날 왜 당에서 받자 하지 않나?》
딱한 질문이였다.
《왜 말을 못하나? 노루막아주바이랑은 공산당의 공자도 몰랐는데 당에서 들라구 해서 들었다구 하던데 난 뭐가 부족한가. 엉, 말해보라구.》
《형님, 그 소린 틀린거우다. 노루막아주바이야 지식은 밭지만 왜정땐 순사들도 패주고… 우리 김일성장군님을 얼마나 높이 받들었소.》
《뭐라구, 그럼 난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지 않는다는거나?》
《아, 그런건 아니구. 좀 진정하라요. 이제 어련히 들게 되지 않을려구요.》
《어련히?》
《한데 왜 갑자기 그걸 따지고드시우?》
《그것도 말이라고 하나. 난 당원이 됐으면 선참 애국미를 바쳤을거다.》
《아니, 그건 무슨 헵뜬 소리우. 당원이 돼야 바친다는건.》
《젠장, 세포위원이란게 둘치소 한가지구나. 자격이란게 있지 않니, 자격! 아 그런데 그 하늘같이 높고높으신 김장군님께 쌀을 바치자문 못해두 당원이 돼야 할게 아닌가?》
억이 막힌 소리였지만 가슴쓰리는 일이였다. 오죽하면 저런 푼수없는 소리까지 하겠는가?
그날 밤으로 아버지와 의논한 끝에 세포위원장을 만났다.
사람은 진국인데… 그지간도 한규의 입당문제를 놓고 가끔 말이 있었으나 《과거의 흠》이 문제로 되여있었다. 더구나 이때는 광복직후와 달리 입당대상을 채로 치듯이 엄선하는 판이라 더욱 난감했다. 저마끔 한숨들을 짓던 끝에 그동안 본인한테도 괴로울것이고 우리에게도 더 큰 실망을 안겨줄수 있다는것으로 불문에 붙였던 《과거》를 정확히 알아보자는것으로 락착을 보았다.
그 다음날 저녁 나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그의 집을 찾아갔다. 살얼음진 둔덕길을 넘어 그의 집앞에 이르자 연한 웃음소리와 함께 흥띤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미세 당기세 미세 당기세
까투리가 날아가면
장끼놈이 뒤따른다
뒤이어 꾀꼬리같이 고운 목소리가 그 노래를 되받았다.
봉황 같은 아들 낳으면
세상 으뜸 일군되고
백합 같은 딸 낳으면
세상 으뜸 효녀되고
청고운 목소리에 취해 슬밋슬밋 다가가던 나는 문창호지에 비낀 그림자를 보고 낯이 화끈해 굳어졌다.
두사람의 모습이 하나로 엉켜돌아가고있었던것이다. 처를 두손 받쳐 안아든 한규는 방안을 빙빙 돌아가며 이번에는 《어화둥둥》을 불러댔다.
《아유- 이젠 내려놔줘요.》
《어째.》
《아파요.》
《어이쿠, 우리 아가 웬일이냐. 어화둥둥 내 사 랑아.》
나는 입을 싸쥔채 물러섰다. 공교롭게도 마당에 흘린 장작가치를 걷어차는 바람에 방안의 말소리와 기척이 뚝 끊어졌다. 나는 도적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드바삐 고양이걸음을 하였다. 《누구요?》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리였다.
《아니, 적은이가 아닌가? 어서 들어오라구. 어서.》
나는 진땀이 내돋는 속에 노루막아주바이네 집으로 가던중이라고 둘러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씽- 하고 내달려온 엄한규가 나의 어깨를 틀어잡 았다.
《거짓부리지.》
황소눈같이 어질고 맑아진 눈을 보자 그를 속인다는것이 미안스러웠다.
《실은 마실을 왔댔는데…》
《응, 그러니 우리 꼬락서닐 보고 삼십륙계로구나.》
《안됐수다.》
《에익, 좀스럽다.》
한규는 내 잔등을 툭 치더니 뜨거운 입김을 쏟으며 속삭였다.
《우리 처가 애를 뱄어. 애를…》
《애기를?…》
《그럼 그래도 그냥 갈셈인가. 한잔 쳐줘야지.》
《형님두, 내가 술 못하는것 알지 않수.》
《그럼 날 찾아온 리유는 뭔가?》
노염찬 소리였다.
《그렇다면… 좀… 저리 갑시다.》
나무가리뒤에 있는 쪽발구에 가앉은 나는 에돌것 없다고 강심을 먹으며 말꼭지를 뗐다.
《내 한가지 물을게 있수.》
《뭔데, 혹시 어제일때문에 아닌가?》
매바위에 올라탄 쪼각달의 푸르스름한 빛발에 한규의 커다란 두눈이 닦은 소방울처럼 번쩍였다. 나는 툭 털어놓고 말했다.
《그렇수꾸마. 다른것 아니구 형님이 강도질한것 하구 가막소에 간거, 술집생활한거… 죄다 알자는거우다.》
발구틀이 움씰했다. 부르르 몸을 떠는 한규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줄기가 일어섰다. 뭔가 큰 고함을 지르려는 형용이였다. 그러나 한규는 씨익- 하고 무거운 한숨만을 내쉬였다. 한참 있어서야 말을 떼였다.
《다들 그렇게 오끼(오해)를 하고있나…》
《글쎄 말해보우다.》
《허허.》
한규는 불시에 너털웃음을 터쳤다.
《그래 내가 강도질할 사람 같나?》
《…》
《하긴 나두 계월이나 나에 대해 뭔가 오끼를 하구있다는걸 알았네만 임자까지…》
한규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럼 말하세나.》
이렇게 되여 나는 오늘날 소설이나 영화들에서나 보게 되는 슬픈 사실의 한토막을 듣게 되였다.
장주사를 때려눕히고 청진으로 간 엄한규는 한동안 일거리를 잡지 못해 여기저기 떠도는 품팔이군이 되였다. 그런 어느날 계월이를 알게 되였다. 하오리바람으로 장거리를 밀려다니던 왜놈 겐까도리(싸움군)들이 물고기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 희롱을 받아들이지 않자 물고기함지가 떨어져내리고 처녀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장마당엔 사람들이 많았건만 다들 혀만 찰뿐 어쩌지를 못하고있었다. 한규가 제지시키려 했다. 허나 그 대답으로 모두매가 날아들었다. 힘이 억대우 같고 성정이 곧은 한규가 어찌 참을수 있으랴. 두놈이 태질을 당하고 한놈이 부샅을 움켜쥐고 끙끙거릴 때 쯔바(쇠나 베클라이트로 만든 흉기)를 든 놈이 그의 뒤골을 들이쳤다. 한규가 정신을 차린 곳은 계월이가 일하는 술집 뒤고방이였다. 머리에는 흰 천이 두둑이 감겨있었다. 계월이가 자기의 속치마를 찢어 감싸맨것이였다. 미음그릇을 놓고 앉아있던 계월은 한규가 정신을 차린것을 보자 눈물까지 글썽해 반가와했다. 한규로서는 어릴적 장질부사로 죽은 녀동생을 다시 보는듯 한 기분이였다. 계월이가 손수 미음을 떠먹일 때도 부끄러움이란 전혀 느끼지 못한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계월의 친척이라고 하는 술집주인내외도 한규에 대해서 여간만 친절하지 않았다. 한규의 일신사를 듣고는 자기들의 술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한규로서는 술집이라는것으로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맞춤한 일자리도 없는데다 그들내외의 친절과 계월이의 눈길에 끌려 선뜻 동의해나섰다. 그런데 얼마간 지내놓고보니 술집주인이란 사람은 촌에서 갓 나온 한규가 부려먹기 좋고 이름짜한 망나니들을 짓조기는걸 보고 집지키는 개 비슷한 격으로 써먹는것이였다. 술집이 웬간히 피자면 주먹깨나 쓰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주인들한테는 한규가 안성맞춤이였던것이다. 이로부터 한규는 술망나니들을 다스리는 《주먹군》노릇과 함께 그 집에서 나무를 사오고 장작을 패고 불을 때고 술을 받아오고 하는 온갖 허접쓰레기일을 도맡아하는 신세로 되고말았다. 역스럽고 고달픈 일이라 떠날 생각도 있었으나 계월이때문에 참았다. 이 집에서 계월은 음식도 하고 손님대접도 하였는데 돈밖에 모르는 그 주인이라는 사람은 친척이라는 연고때문인지 몸파는 일까지는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돈냥깨나 있는 놈이 오면 노래 부르는 일만은 꼭 하게 했다. 한규로서는 계월이가 술취한 놈팽이들앞에서 노래 부르는것이 제일 질색이였다. 그래서 계월이가 그런 방에 갈 때면 슬며시 따라가서는 인기척도 내고 안 나오는 기침까지 하면서 어슬렁거렸다. 주인도 그것을 알았으나 모르는척 했다.
한규가 온 뒤부터 왈짜패들의 야료와 공술먹기가 적어진때문이였다.
그런 어느날 저녁 열병에 걸려 덜덜 떨며 앓아누운 한규에게 계월이가 달려왔다. 주인이라는 사람이 반회장치마저고리를 주면서 오늘 저녁에는 목욕도 하고 치장도 잘한 다음 귀한 손님 한명을 잘 접대하라고 했다는것이였다. 계월은 이제까지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비맞은 병아리처럼 떨었다.
계월이도 한규와 같은 고아였다. 신통히도 장질부사가 돌아 한규네 부모들과 누이동생이 잘못된 해에 부모식솔을 죄다 잃고 친척집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얻어먹다가 한규보다 한해 먼저 이 집에 자리잡은 계월은 그 처지의 공통성때문에 한규를 더욱 따랐고 한규 역시 그런 사정을 듣고부터는 아예 혈붙이처럼 계월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니 수상스럽기 짝이 없는 《접대》에 계월이가 불려간다는 사실을 놓고 어찌 누워만 있을수 있겠는가. 계월이로부터 《접대》방을 알아둔 그는 귀한 손님이 온다는 그바루해서 기다싶이 뒤마당에 나가 작대기 하나를 얻어들었다. 그것없이는 한걸음도 내짚기 어려운 몸이였다.
복도처럼 긴 널마루 한쪽켠의 기둥뒤에 쭈그리고 앉은 한규는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계월이가 어느 한 방에 들어가고 음식 나르는 녀인들의 발길도 멎자 주인이라는 사람은 미닫이 안쪽마루의 색전등마저 죄다 꺼버렸는데 그것으로 하여 계월이가 들어간 방을 더 잘 살필수 있었다. 붉은 색전등이 요염한 빛을 뿜는 그 방에서 계월의 노래소리가 울리고 그뒤를 이어 너털웃음과 손벽치는 소리를 들으며 한규는 장다리를 계속 꼬집어댔다. 심한 고열로 정신이 흐려지기때문이였다.
한식경도 못되여 그악을 부리는 웨침과 씩씩거리는 사내의 숨결이 흘러나왔다. 끙 하고 일떠난 한규는 제잡담 문을 열어젖히며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계월은 옷이 흐트러진채 구렝이에 감긴 병아리꼴이 되여있었고 그를 덮쳐안은 놈은 가슴팍이 온통 털부숭이인데 배꼽우의 문신을 보니 왜놈이였다. 후에 알았지만 이놈은 도경찰부장의 동생되는 오입쟁이로 북관땅의 미인들을 차례돌림으로 못 쓰게 만드는 색마였다. 놈은 그런 개짓을 하는 왈짜들이 대개 그러하듯 호신용단도까지 가지고있었다. 한규가 앓지 않을 때라면 그깐것이 무엇이랴. 작대기덕택으로 그놈을 겨우 때려눕혔다. 다행스러운것은 그때까지 주인이건 뭐건 얼씬하지 않은것이다. 이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건 꿈쩍 말라고 한 주인놈의 신칙때문이였다.
《죽었어요.》 계월이가 하는 말에 엄한규는 정신을 차렸다. 놈은 정말 죽은것 같았다. 먼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절반 사색이 된 계월을 그냥 두고 간다는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여 무작정 계월의 손을 틀어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도 없는 밤이라 천방지축 내달리다가 산길로 접어 들었다. 산을 몇개나 넘었는지 모른다. 열병도 그 길에서 뚝 떨어진듯 했으나 어느 한 산골짜기의 초가마가리에 들어서자 정신도 기운도 죄다 사라져버렸다.
나흘간을 꼬박 누워앓은 끝에 일어나보니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 며느리 내외가 함께 사는 초가마가리주인들의 인심은 후더웠으나 하루 두끼 송기죽으로 지내는 집의 군식구로 눌러살순 없었다.
어데로 가서 어떻게 살것인가.
아직도 걸음걸이가 제대로 못되여 먼길을 갈수 없는 형편이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계월이가 소리없이 사라졌다.
주인집할아버지는 계월이가 뭔가 변통을 하겠다고 떠나갔다고 했지만 한규로서는 부아가 터질 지경이였다. 역시 술집에서 치여나다나니 버릇이 잘못 붙었다고 원망도 하고 한탄도 했다.
그런데 계월이가 떠난지 닷새만에 우편배달이 편지를 가지고 나타났다. 이 집 로인의 이름으로 온 편지봉투안에는 돈 20원과 한규한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글을 모르는 계월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쓴 편지에는 병이 도지지 않는가, 다달이 돈을 부칠터이니 괴로운대로 그 집에 그냥 눌러살면서 다른 소식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였다.
한규는 울었다. 계월은 자기때문에 그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친척이라는 자의 술집에 다시 간것이였다. 사내명색에 돈과 편지를 받고 그냥 있는다는것이 죄스러워졌다. 무엇보다 그 친척이라는 자의 손에서 계월을 빼내야 한다는 생각이 불같이 앞섰다. 하여 신세막심한 집에 하직인사를 고하고 계월을 찾아떠났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도경찰부장의 동생을 중태에 빠뜨렸다는 죄명으로 한규에게 지명수배가 붙어있었다. 결국 한규는 술집어방을 에돌다가 계월이와는 만나지도 못한채 오라를 지게 되였다. 그다음 재판을 받고 청진감옥으로 가게 되였는데 재판정 증인으로 출석한 술집주인에게 계월이가 잘못되는 날에는 감옥에서 풀려나오는 길로 밟아죽이겠다고 한 말때문에 형기를 반년 넘게 더 받았다.
그때의 으름장탓인지 광복덕에 놓여나오니 그런대로 계월이가 무사한것이 기쁨으로 되였다. 한규가 역을 지고 살 때 계월이가 여러번 면회를 왔다고 했다. 면회실 창구멍으로 정성스레 담아싼 음식꾸레미를 들이밀며 눈물이 갈그랑해 부디 건강하라고 당부하는 계월의 모습은 두번 죽었다 살아나도 이 녀자와는 헤여질수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감옥에서 풀려나면 그가 설사 몸을 망쳤더라도 일생 떠받들며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였고 실지 그렇게 되여 짝을 이루었던것이다.…
《그러면 그렇겠지.》
한규의 과거사를 알게 된 마을어른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쳤다. 이로부터 한달후에 한규의 입당문제가 결정되였고(이 일때문에 세포위원장은 물론 비당원인 꼽새령감까지 군당에 찾아다녔음을 부언하게 된다.) 이듬해 봄에는 한규의 처가 쌍둥이를, 그것도 오누이를 낳았다. 그 집의 경사이자 까툴골의 경사였다.
《장끼와 까투리가 알맞춤 날겠구나.》
서당집할아버지는 이 일을 놓고 세월이 좋아가는 징조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일로 한규와 세포위원장이 당책벌을 받는 사건이 생겼다. 일인즉은 군당지도사업차로 나왔던 도당부장이라는 사람이 까툴골에 찾아든데서부터 시작되였다. 장주사의 사랑채에 당원들을 모이게 한 그는 사전료해를 어떻게 했던지 다짜고짜 《반봉건투쟁》에서의 《태공》을 놓고 억지다짐의 추상 같은 질책으로 절반 얼궈놓은 다음 매 당원들을 불러세웠다.
남녀평등권법령이 언제 나왔는데 여기선 아직까지 《녀필종부》(녀자는 남편의 노복이라는 뜻)인가. 녀자들은 남정네만 나타나면 머리를 수그리고 길까지 비켜선다는데 이런 《까막산골》이 어데 있는가. 그뿐인가. 여기 남자들도 몇살우의 사람만 보면 무릎절인지 앉은절인지 한다는데 이거야 공자, 맹자의 수제자이지 맑스, 레닌선생의 프로레타리아트라고 할수 있는가. 우리 당은 당신들과 같은 농민들도 프로레타리아투사로 되기를 바란다. 프로레타리아투사! 프로레타리아투사는 첫째도 둘째도 오직 투쟁, 투쟁만을 알아야 한다.… 도당부장이라는 사람의 말을 쥐여짜면 이것이 전부라고 할수 있다.(미리 밝혀두건대 이 부장이라는 사람은 당시 우리 도당의 요직에 잠입했던 종파분자 장순명과 단짝을 이루고있던 《얼마우제》였다.)
《그래 계속 봉건편에 설텐가?》
도당부장의 서슬푸른 물음에 다들 입을 비끄러매고있었으나 한규만은 례외였다.
《설에 세배랑 할 때두… 무릎절을 하면 안됩니까?》
《허, 이 사람이 그래 동문 계속 봉건질을 하겠다는건가?》
《봉건질이야… 그렇지만… 세배를 할 때 그냥 뻗치구 서있을수야 없지 않수꾸마.》
탕! 오동나무응접탁이 드르릉 울었다.
《동무도 당원이야? 어떻게 돼서 저런 사람이 당에 들었는가.》
부라리는 눈매가 험악스러웠다. 그와 함께 왔던 군당일군이 뭐라 말하자 시퍼렇게 질려 굳어졌던 얼굴에 차거운 비웃음이 비꼈다.
《문제가 있구만. 문제가… 동문 나가보우.》
팽팽한 긴장이 서린 가운데 엄한규가 나가자 그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 동무를 출당시키는데 찬성하는 동무들은 손을 드시오.》
너무나도 뜻밖의 사태에 다들 아연실색한 기색으로 침묵을 지키자 부장은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문제로군. 다들 싸고돈다?!… 세포위원장! 동무부터 의견을 말해보오.》
세포위원장도 절반 사색이 된 얼굴로 일어섰으나 말은 바르게 했다.
《그 동물… 출당시키는건… 리해되지 않습니다. 그 동문… 사람이 진국인데다가…》
《여보!》
또 한번 응접탁이 울었다. 세포위원장을 쏴보던 눈길이 우리에게 멎었다.
《동무들도 이 세포위원장과 같은 생각인가?》
《…》
《흠, 그러고보니 여긴 부하린도당의 소굴이구만.》
이 소식은 마을사람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글쎄 가박힌다는것이 술집이라니 사람되긴 싹수가 글렀다.》 아버지는 온 하루밤 자지도 못했다. 그런 어느날 숱한 순사들이 골안에 쓸어들어 온 동네를 발칵 뒤지며 한규를 찾았다. 한규가 강도질을 하고 술집녀자까지 꿰차고 도망질을 쳤다는것이였다. 왜놈들 말이라면 덮어놓고 도리질하는 마을사람들이였건만 이번만은 기웃하게 되였다.
《끝내 신세를 그르쳤구나.》 우리 집에서는 이때부터 엄한규에 대한 말을 일체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데려다 길렀던것까지 후회막심해하였다. 그런데 광복된 해 가을 뜻밖에도 엄한규가 우리 골안에 나타났다. 그것도 홀몸이 아니라 얼굴도 희고 손도 흰 《하이칼라》녀자를 데리고 찾아든것이다.
동네 개란 개는 다 떨쳐나 짖어댔다. 베옷 하나로 일년 사시절을 지내는 골안사람들과는 너무나 유표한 차림때문인것이였다.
한규는 맥고모에 밤색골덴양복차림이였고 이 고장 녀인들의 눈이 휘돌아갈 정도로 예쁜 녀자는 초록비단치마에 흰 모본단저고리를 입고있었다. 한규때문에 문밖에 나왔던 녀인들은 도회녀자의 요란스러운 차림에 기가 질린듯 도로 들어가 경멸과 시샘이 섞인 눈길을 문창호지구멍에 대고 점도록 보았다. 도회지녀인은 몸차림에 알맞추 조그마한 보따리를 하나 이였고 한규는 커다란 궤짝 두개를 질빵으로 동여지였다. 그는 곧바로 우리 집을 겨눠 찾아들었다. 도회지생활탓인지 그의 얼굴은 이전의 적동색이 아니라 배추속대처럼 허옇게 피기를 잃고있었다. 그러나 그 기상이란 수만외적을 쳐물리치고 온 개선장수와 같았다. 우리는 처음에 그를 어떻게 맞았으면 좋을지 당황했다. 《… 강도질을 하고… 술집녀자를 꿰차고…》 하는 불쾌스러운 과거와 그 사실을 반증하듯 하는 도회녀자의 출현은 무작정 솟구쳐나가려는 반가움을 억제했다. 《그러나저러나 우릴 믿고 찾아왔는데…》 하는 아버지의 말이 모든것을 결정하였다. 한규의 험악스런 과거는 모르쇠를 하기로 타합이 되였다.
한규가 가지고 온 재산이란 옷가지 몇벌에 이불과 그릇따위들이였는데 거기엔 우리 어머니에게 해오는 모본단치마저고리 한벌과 아버지며 동리어른들께 대접하려고 장만했다는 되들이술 2병이 있었다.
그날 저녁 동네어른들 거의가 한규를 찾아보러 왔다. 어쨌든 이 마을에 있으며 정을 붙였던 사람이 아닌가. 한규는 도회에서 살았으나 예전의 례법은 어기지 않고 오는이마다 문전에서 맞아 무릎절을 하였다. 색다른 녀자를(분명히 술집 논다니였을) 차고왔다는데로부터 미리부터 이마살을 찌프리고 들어서던 로인들도 눈물이 그렁해 무릎절을 하는 한규를 보고는 얼마간 숙부드러워들 졌다. 한규가 지고온 짐속에서 축음기인지 뭔지를 꺼내놓지 않고 얌전스레 묻는데나 대꾸하고 과거의 《허물》을 툭 빠개놓았다면 모든데 대해서 널리 《용서》를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규는 자기의 《강도》건이나 데리고온 녀자에 대해 털어놓고 《회개》할 대신 축음기를 틀어놓고 《가르치러》 드는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아니, 어째서 여긴 쪼끔도 달라진것이 없수꾸마, 광복이 됐으니 우리 세상 아니꾸마. 이젠 다들 노래랑 부르며 즐겁게 살아야 하우다.》
그는 더없이 장한 일을 하는양 두눈이 거스름해서 축음기태엽돌리개를 슬슬 돌리며 여기 싱긋, 저기 벙긋 웃어보였다. 축음기판이 련속 바뀌며 돌아가자 무슨 《맹꽁이타령》, 《날 다려가소》, 《울산타령》이요가 거들먹지게 흘러나왔다. 어깨가 들먹거릴 정도였다. 국수를 누르느라 부엌에서 서성대던 아낙네들까지 눈에 《바람기》가 일어 올라왔다. 그러나 엄한 표정을 짓고 댕댕해 앉아있는 동네좌상들의 시쁘둥한 기색을 보고는 자기네도 별로 흥심이 없다는듯 되돌아나갔다. 눈치없이 좋아하는것은 아이들뿐이 였다.
한규는 아이들덕에 몇판 더 돌리고는 축음기뚜껑을 닫았다.
《…다들 좋아했는데…》
우리 골안사람들은 비록 배운것은 없어도 례절과 도리는 아는 사람들이여서 한규가 먼저 까밝히지 않는한 그의 께름한 전 생활을 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로 이러저러한 억측과 꾸며진 말들이 이입저입을 통해 온 마을에 나돌았다. 한규는 술집에서 웃음 팔고 몸파는 녀자와 정분이 나 강도질까지 했고 그 덕에 가막소(감옥)를 나왔다, 광복바람에 가막소에서 풀려나온 그는 몸파는 일을 할수 없게 되여 한지에 나앉은 녀자를 꿰차고 살데 없으니 이 골안으로 찾아들었다… 하고. 특히 녀인들의 입심이 심했다. 이 고장녀인들은 인정에 무르고 어질었지만 그 입심들이란 여간 아니였다. 더구나 일생 비단옷 한벌 못 입고 살면서도 그 깨끗한 마음과 결백을 보물처럼 안고 살아가는 그네들에게는 《이 남자, 저 남자 마구 곁들인 녀자》에 대해서는 같은 녀성으로서의 분격과 수치를 느끼며 멸시하였고 자기들의 거치른 손과 얼굴과는 판이하게 고운 분결 같은 살을 두고 시샘과 질투까지 느꼈으니 말끝마다 가시가 섞여있었다. 그런데 마을에서의 이런 뒤시비를 본인당자는 전혀 모르고있었다는것이다. 딱한 일이였다. 생각 같아서는 그전 일들을 툭 빠개놓고 물어보고싶었지만 남의 상처를 꼬집는듯 싶어 주저되였고 또 그럴 틈도 없었다. 마당질과 겨울나이화목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속에서 한규 역시 우리 집 마당질로부터 손포가 모자라는 집일을 돕느라 뛰여다니다나니 끼니때에나 얼핏 마주 볼뿐이였다.
그가 우리 집에 와 며칠을 지낸 뒤 앞으로의 거처를 어데 정하는가 하는 문제로 마을어른들 몇이 와서 의논이 붙었다. 모두가 장주사의 사랑채가 비였으니(장주사는 광복되는 날 밤 행랑머슴만을 남기고 솔가도주를 했었다.) 림시변통으로 엄한규내외를 거기서 살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엄한규가 거절했다.
《안되우꾸마. 거긴 공산당위원회를 꾸릴 자리로 그냥 둬야 되꾸마.》
공산당이라니, 모든 사람들의 눈이 떼꾼해졌다. 읍에서랑 무슨 혁명자들이 공산당을 조직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까막산골바우들이 있는 화전골에 공산당이 선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걸 내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이 엄한규라는데서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학교란 문턱조차 밟지 못했지만 세상사에는 자못 밝다고 생각하는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어른들은 뻐꾹소리도 못하고 그의 입만 지켜 보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한규는 견마잡힌 생원님격으로 조를 뺐다.
《참, 아주바이들두… 정말 맥혔수꾸마.》 하는 말로 시작된 그의 공산당해설의 골자인즉은… 공산당은 제일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활빈당》 비슷한것인데 왜놈이나 장주사따위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죄다 들어야 한다. 김일성장군님께서두 공산당편이시다.…
어허, 장군님께서 공산당이라, 그러면 공산당이 돼야 하고말고. 소동축들은 물론 로인들이 더 들고 나섰다. 한규의 거처문제는 마당질 뒤거둠이 끝나는 차례로 집을 짓는다는것으로 일단락을 보고 공산당조직문제로 의논을 펼치던 끝에 다음날 나랑 몇사람해서 군에 가 알아보기로 했다. 군에는 벌써 공산당이 조직돼있었다. 군당비서가 우리를 만나 공산당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돌아가는 길에 젊은 지도원(부원) 한사람을 딸려보냈다. 그 지도원은 마을의 좌상들로부터 우리 같은 소동축까지 거의 전부를 만나 담화를 한 끝에 일곱사람으로 이 골안의 첫 당세포를 꾸렸다. 나까지 포함되였다는데서 좀 어색하긴 하지만 이 일곱사람은 우리 골안에서 그 누구의 말밥에도 오르지 않을만치 성실하고 뚜글뚜글한 농군들이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엄한규는 당에 들지 못했다. 다들 그의 께적지근한 과거를 두고 머리를 저었기때문이다. 그를 보기가 딱했다. 여하튼 공산당조직을 설도한것이 그가 아닌가. 그러나 공산당에는 아무 사람이나 드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온 마을이 알고 있는 때라 어쩌는수가 없었다. 다행히 한규는 별로 타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첫 당세포모임을 우리 집 웃방에서 했는데 한규는 온종일 장작을 패였다. 온통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이 뻘겋게 질린 한규는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우리들께 벙그레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한규네 집은 노루막치기 삼굿터에 지었다. 닷새동안에 온 마을이 달라붙어 달구질을 하고 재목을 마르고 벽을 쌓고 하여 3칸짜리 집을 얼싸하게 세워 놓았다. 우리 동리인심은 이런데서 나타났다. 아낙네들까지 다 떨쳐나 찰흙을 이긴다, 서까래를 다듬는다 분주탕을 피웠다. 한규네가 비록 옷차림은 뜨르르하게 하고 왔지만 피쌀 한말 없다는것을 아는 아낙네들은 좁쌀이면 좁쌀, 감자면 감자를 바가지에, 함지에 담아 저저마다 가져왔다. 그런데는 이 《도고한》 촌부녀들이 《술집기생》과 인사수작이 싫어 황황히 구들에 쏟아놓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는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 며칠 엄한규는 내처 말이 없었다. 약간 넋이 빠진듯 한 기색으로 여기저기 일에 삐쳐들다가는 멍하니 무슨 생각에 잠기군 하였다.
안해라는 녀자 역시 그랬다. 꿩의 깃털같이 아롱거리는 치마저고리를 입은채 이영짚을 만들어 올리기도 하고 저쪽에서 부뚜막매질흙을 찾으면 그 가냘픈 손으로 흙반죽을 싸들고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러나 그 열성이 허탕을 볼 때가 많았다. 부뚜막매질흙을 가져간다는것이 짚이 섞인 지붕흙을 가져가고 지붕흙을 나른다는것이 부뚜막매질흙을 가져가는 판이였다.
《이녁은 그만두라구.》
로인들이 말릴 때까지 녀인은 어쩔바를 모르며 이렇게 일판의 여기저기에 보람없이 뛰여다녔다. 동리부조가 연신 들어올 때는 방구석에 쪼그리고앉아 울기만 했다.
《집들이잔치》를 요란스럽게 했다.
아버지는 집에 하나밖에 없던 돼지를 잡게 했고 이미전에 부조낟알들을 가지고왔던 마을녀인들까지 좁쌀떡이며 감자지짐 같은것을 해가지고 왔다.
큰상앞에 한규부처를 나란히 앉힌 아버지는 한규가 가지고온 되들이병술을 동리어른들께 한잔씩 붓게 하는것으로 식을 떼였다. 그러고보면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이날을 예견한셈이였다.
술이 한순배 돌자 아버지가 거나한 목소리로 입을 떼였다.
《한규, 이 사람, 우리 죄가 막심하네. 소년에 이 골안으로 와 우리한테 정붙여 의지하고 살려 했네만 다 같은 망국노신세라 끝까지 돌봐줌이 부족해 험한 길을 걷게 했어. 일인즉 정말 안됐네만 이제 와서 과거지사를 더 따져 뭘하겠나. 오늘의 이 자리를 환도길로 삼으세나. 그리구 여기 들까부는 아낙들이 임자네 대해 뻐꾸기소리가 많네만 이제부턴 더 없을것으루 아네. 다 나쁜 세상 산탓이 아닌가. 그러니 새댁도 이걸 알구 우리 골안붙이들을 혈육으로 삼아 잘 살아봅세나. 자, 그런 뜻에서 임자두 들게.》
아버지는 한규가 가져온 술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머루와 다래로 담근 발효주를 한바가지 푹 떠서 내밀었다. 한규는 무릎을 꿇은채 두손 받쳐 바가지를 들고 갱생의 결심을 보일듯이 단숨에 밑굽까지 비워 버렸다. 화주는 아니여도 이 술은 몸에 즉시 피는것이여서 한규의 얼굴은 대번에 오지독이 되였다. 벌거우리한 볼에 눈물이 맺혀 번들거렸다. 아버지는 대견스럽게 머리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작은 보시기에다 술을 담아 한규의 처에게 권했다. 모두의 눈이 《놀아난》 녀인의 술마시는 모양을 호기심넘쳐 보았다. 그때의 상식으로는 술집녀자들이란 남자들 못지 않는 술고래라는때문이였다.
뿌직뿌직 타는 겨릅등밑에서 계월이라고 하는 녀자의 동그스름한가 하면 네모져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 밀랍처럼 해쓱한 빛을 띠였다.
그 순간 방안에는 숨소리조차 꺼진듯 했다. 하지만 인차 실망어린 한숨이 새여나왔다. 한규의 처는 보시기에 입술만을 대였다가 떼였을뿐이였다.
《에그, 역기도(꾀바르다) 하지비. 여기선 제법 내우를 하는구만.》
어느 구석에선가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모두가 술에 거나해지고 밤도 깊어 파장이 될녘에 갑자기 한규가 벌떡 일어섰다.
《아부님들, 아재들, 고맙수꾸마. 제… 이 신셀 잊지 않겠수꾸마. 정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술기운으로 떠들썩하던 방안이 삽시에 조용해졌다. 손등으로 눈굽을 뻑 닦고난 한규는 앞옷자락을 자꾸 비트는데 굵직한 목의 울대뼈가 오르내리는것이 애처로울 지경이였다. 그가 다시 입을 떼였을 때 목소리는 울음져있었다.
《한데… 아부님들… 아재들… 우리 저 사람은 나쁜 계집이… 기생이… 아니꾸마. 정말이꾸마. 정말!》
그리고는 풀썩 물앉았다. 그때까지 고개를 짓숙이고있던 한규의 처 계월은 《흑》 하는 소리와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싸쥔채 연한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고장에는 지꿎은 봉건이 있어 녀인들이 웃어른들앞에서 우는것은 도덕머리가 없는것으로 비난받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좌석에서는 누구도 그런 티를 보이지 않았다.
꼽새령감이 계월에게 다가가 어깨를 쓸어주었다.
《새애기, 울지 말라구. 임자 스나말이 옳네. 암, 그렇구 말구.》
꼽새령감의 눈굽도 붉어졌고 우리 아버지나 다른 어른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그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이날 밤의 일로 하여 한규처에 대한 뒤소리는 가신듯이 없어졌다. 마당질과 겨울나이차비까지 다 끝나게 되자 그를 찾아오는 녀인들이 많아졌다. 마을어른들속에서는 그 새애기(새각시)의 인사례절을 본 받으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이듬해 토지개혁때에는 마을어른들의 일치한 주장밑에 이 골안에서 일등가는 노란자위인 장주사의 약초밭과 새로 일군 화전을 한규네가 부치도록 했다.
파종때가 가관이였다.
겨우내 삼실을 잣고 베짜는 법을 배우느라 시종 방에 있어서인지 이 골안에 올 때보다 얼굴이 더욱 희여진 계월이가 머리수건을 푹 눌러쓰고 밭에 나서자 온 마을녀인들이 저마끔 그의 선생노릇을 하였다. 조씨는 어떻게 뿌리고 감자씨는 요렇게 묻고… 억대우 같은 한규가 밭갈이를 먼저 끝낸데도 있지만 인정 많은 녀인들의 도움으로 이해 파종은 그들이 제일먼저 끝냈다.
한규는 힘이, 계월은 이악이 발발했다. 동네 《빚》을 갚겠다고 늘 밭에 나와 살았다. 달이 있을 때는 밤에도 나와 후치질과 호미질을 했는데 계월이도 꼭꼭 따라나서군 했다. 둘사이의 금슬이 대단히 좋았다. 일하다말고 둘이 나란히 앉아 땀을 들이는것을 볼 때면 막 부러워날 지경이였다. 놀라운것은 술집녀자로 살았다는 계월이가 농사일에 매우 쉽게 익숙된것이였다. 한여름이 지나자 그의 손과 얼굴도 이 고장녀인들 진배없이 까맣게 탔으며 일솜씨도 벌찼다. 호미질 몇번에 손바닥이 터져나가던 녀자가 진거름을 주물고 한함지 넘는 거름을 이고 산비탈로 씽씽 오르내렸다. 한해도 채 안되는 사이에 계월은 완전한 까툴골사람이 되였던것이다. 뿐만아니라 모든 녀인들이 한규의 처라면 오금을 못 쓸 정도로 정을 붙였다.
녀자가 인물이 고운데다가 성정이 유순하면서도 싹싹했다. 혼자 있을 때면 호수 같은 눈에 침침한 그늘 같은것이 어려있어 접근하기 어렵지만 녀인들속에 있을 때면 고요한 호수 같은 눈에서 웃음의 불꽃이 방긋거리고 까르르 터치는 웃음은 성난 사람의 얼굴마저 밝게 할 정도로 발랄하고 정겨웠다. 특히나 음식솜씨가 뛰여난것으로 마을집 대사때마다 불리워갔다.
첫해 가을을 하고 탈곡을 끝마쳤을 때 우리는 모두가 부자가 될수 있다는것을 알았다. 현물세를 바치고도 한해 반 여분의 량곡이 남았던것이다.
한규의 처가 처음 나타났을 때 이 골안녀인들의 가슴을 긁었던 비단옷들이 늘어나고 그 옷들을 차려 입고 한규네의 축음기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법이 새로 생겨났다. 나날이 웃음과 노래속에 한해가 저무는 어느날 황해도의 한 농민이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에 고마움을 아뢰이며 애국미를 헌납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날 저녁으로 우리 집은 동리어른들의 《회의장》이 되였다.
《우리 골사람들이 제일 곧은 백성이라구 하지만 다들 개나발일세. 백성으로 말하면-》
이렇게 운을 뗀 서당집할아버지의 불충불효에 대한 지탄과 저마끔의 《자기비판》들이 있었다. 하지만 먹고 남을 량곡들을 거의다 옷이요, 그릇이요에 써버린통에 다음해로 미루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토방턱에 주저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규는 동리어른들을 바래주러 나온 나의 손목을 느닷없이 잡아쥐고 뜻밖의 질문을 들이댔다.
《동생, 날 왜 당에서 받자 하지 않나?》
딱한 질문이였다.
《왜 말을 못하나? 노루막아주바이랑은 공산당의 공자도 몰랐는데 당에서 들라구 해서 들었다구 하던데 난 뭐가 부족한가. 엉, 말해보라구.》
《형님, 그 소린 틀린거우다. 노루막아주바이야 지식은 밭지만 왜정땐 순사들도 패주고… 우리 김일성장군님을 얼마나 높이 받들었소.》
《뭐라구, 그럼 난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지 않는다는거나?》
《아, 그런건 아니구. 좀 진정하라요. 이제 어련히 들게 되지 않을려구요.》
《어련히?》
《한데 왜 갑자기 그걸 따지고드시우?》
《그것도 말이라고 하나. 난 당원이 됐으면 선참 애국미를 바쳤을거다.》
《아니, 그건 무슨 헵뜬 소리우. 당원이 돼야 바친다는건.》
《젠장, 세포위원이란게 둘치소 한가지구나. 자격이란게 있지 않니, 자격! 아 그런데 그 하늘같이 높고높으신 김장군님께 쌀을 바치자문 못해두 당원이 돼야 할게 아닌가?》
억이 막힌 소리였지만 가슴쓰리는 일이였다. 오죽하면 저런 푼수없는 소리까지 하겠는가?
그날 밤으로 아버지와 의논한 끝에 세포위원장을 만났다.
사람은 진국인데… 그지간도 한규의 입당문제를 놓고 가끔 말이 있었으나 《과거의 흠》이 문제로 되여있었다. 더구나 이때는 광복직후와 달리 입당대상을 채로 치듯이 엄선하는 판이라 더욱 난감했다. 저마끔 한숨들을 짓던 끝에 그동안 본인한테도 괴로울것이고 우리에게도 더 큰 실망을 안겨줄수 있다는것으로 불문에 붙였던 《과거》를 정확히 알아보자는것으로 락착을 보았다.
그 다음날 저녁 나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그의 집을 찾아갔다. 살얼음진 둔덕길을 넘어 그의 집앞에 이르자 연한 웃음소리와 함께 흥띤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미세 당기세 미세 당기세
까투리가 날아가면
장끼놈이 뒤따른다
뒤이어 꾀꼬리같이 고운 목소리가 그 노래를 되받았다.
봉황 같은 아들 낳으면
세상 으뜸 일군되고
백합 같은 딸 낳으면
세상 으뜸 효녀되고
청고운 목소리에 취해 슬밋슬밋 다가가던 나는 문창호지에 비낀 그림자를 보고 낯이 화끈해 굳어졌다.
두사람의 모습이 하나로 엉켜돌아가고있었던것이다. 처를 두손 받쳐 안아든 한규는 방안을 빙빙 돌아가며 이번에는 《어화둥둥》을 불러댔다.
《아유- 이젠 내려놔줘요.》
《어째.》
《아파요.》
《어이쿠, 우리 아가 웬일이냐. 어화둥둥 내 사 랑아.》
나는 입을 싸쥔채 물러섰다. 공교롭게도 마당에 흘린 장작가치를 걷어차는 바람에 방안의 말소리와 기척이 뚝 끊어졌다. 나는 도적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드바삐 고양이걸음을 하였다. 《누구요?》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리였다.
《아니, 적은이가 아닌가? 어서 들어오라구. 어서.》
나는 진땀이 내돋는 속에 노루막아주바이네 집으로 가던중이라고 둘러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씽- 하고 내달려온 엄한규가 나의 어깨를 틀어잡 았다.
《거짓부리지.》
황소눈같이 어질고 맑아진 눈을 보자 그를 속인다는것이 미안스러웠다.
《실은 마실을 왔댔는데…》
《응, 그러니 우리 꼬락서닐 보고 삼십륙계로구나.》
《안됐수다.》
《에익, 좀스럽다.》
한규는 내 잔등을 툭 치더니 뜨거운 입김을 쏟으며 속삭였다.
《우리 처가 애를 뱄어. 애를…》
《애기를?…》
《그럼 그래도 그냥 갈셈인가. 한잔 쳐줘야지.》
《형님두, 내가 술 못하는것 알지 않수.》
《그럼 날 찾아온 리유는 뭔가?》
노염찬 소리였다.
《그렇다면… 좀… 저리 갑시다.》
나무가리뒤에 있는 쪽발구에 가앉은 나는 에돌것 없다고 강심을 먹으며 말꼭지를 뗐다.
《내 한가지 물을게 있수.》
《뭔데, 혹시 어제일때문에 아닌가?》
매바위에 올라탄 쪼각달의 푸르스름한 빛발에 한규의 커다란 두눈이 닦은 소방울처럼 번쩍였다. 나는 툭 털어놓고 말했다.
《그렇수꾸마. 다른것 아니구 형님이 강도질한것 하구 가막소에 간거, 술집생활한거… 죄다 알자는거우다.》
발구틀이 움씰했다. 부르르 몸을 떠는 한규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줄기가 일어섰다. 뭔가 큰 고함을 지르려는 형용이였다. 그러나 한규는 씨익- 하고 무거운 한숨만을 내쉬였다. 한참 있어서야 말을 떼였다.
《다들 그렇게 오끼(오해)를 하고있나…》
《글쎄 말해보우다.》
《허허.》
한규는 불시에 너털웃음을 터쳤다.
《그래 내가 강도질할 사람 같나?》
《…》
《하긴 나두 계월이나 나에 대해 뭔가 오끼를 하구있다는걸 알았네만 임자까지…》
한규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럼 말하세나.》
이렇게 되여 나는 오늘날 소설이나 영화들에서나 보게 되는 슬픈 사실의 한토막을 듣게 되였다.
장주사를 때려눕히고 청진으로 간 엄한규는 한동안 일거리를 잡지 못해 여기저기 떠도는 품팔이군이 되였다. 그런 어느날 계월이를 알게 되였다. 하오리바람으로 장거리를 밀려다니던 왜놈 겐까도리(싸움군)들이 물고기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 희롱을 받아들이지 않자 물고기함지가 떨어져내리고 처녀의 옷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장마당엔 사람들이 많았건만 다들 혀만 찰뿐 어쩌지를 못하고있었다. 한규가 제지시키려 했다. 허나 그 대답으로 모두매가 날아들었다. 힘이 억대우 같고 성정이 곧은 한규가 어찌 참을수 있으랴. 두놈이 태질을 당하고 한놈이 부샅을 움켜쥐고 끙끙거릴 때 쯔바(쇠나 베클라이트로 만든 흉기)를 든 놈이 그의 뒤골을 들이쳤다. 한규가 정신을 차린 곳은 계월이가 일하는 술집 뒤고방이였다. 머리에는 흰 천이 두둑이 감겨있었다. 계월이가 자기의 속치마를 찢어 감싸맨것이였다. 미음그릇을 놓고 앉아있던 계월은 한규가 정신을 차린것을 보자 눈물까지 글썽해 반가와했다. 한규로서는 어릴적 장질부사로 죽은 녀동생을 다시 보는듯 한 기분이였다. 계월이가 손수 미음을 떠먹일 때도 부끄러움이란 전혀 느끼지 못한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계월의 친척이라고 하는 술집주인내외도 한규에 대해서 여간만 친절하지 않았다. 한규의 일신사를 듣고는 자기들의 술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한규로서는 술집이라는것으로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맞춤한 일자리도 없는데다 그들내외의 친절과 계월이의 눈길에 끌려 선뜻 동의해나섰다. 그런데 얼마간 지내놓고보니 술집주인이란 사람은 촌에서 갓 나온 한규가 부려먹기 좋고 이름짜한 망나니들을 짓조기는걸 보고 집지키는 개 비슷한 격으로 써먹는것이였다. 술집이 웬간히 피자면 주먹깨나 쓰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주인들한테는 한규가 안성맞춤이였던것이다. 이로부터 한규는 술망나니들을 다스리는 《주먹군》노릇과 함께 그 집에서 나무를 사오고 장작을 패고 불을 때고 술을 받아오고 하는 온갖 허접쓰레기일을 도맡아하는 신세로 되고말았다. 역스럽고 고달픈 일이라 떠날 생각도 있었으나 계월이때문에 참았다. 이 집에서 계월은 음식도 하고 손님대접도 하였는데 돈밖에 모르는 그 주인이라는 사람은 친척이라는 연고때문인지 몸파는 일까지는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돈냥깨나 있는 놈이 오면 노래 부르는 일만은 꼭 하게 했다. 한규로서는 계월이가 술취한 놈팽이들앞에서 노래 부르는것이 제일 질색이였다. 그래서 계월이가 그런 방에 갈 때면 슬며시 따라가서는 인기척도 내고 안 나오는 기침까지 하면서 어슬렁거렸다. 주인도 그것을 알았으나 모르는척 했다.
한규가 온 뒤부터 왈짜패들의 야료와 공술먹기가 적어진때문이였다.
그런 어느날 저녁 열병에 걸려 덜덜 떨며 앓아누운 한규에게 계월이가 달려왔다. 주인이라는 사람이 반회장치마저고리를 주면서 오늘 저녁에는 목욕도 하고 치장도 잘한 다음 귀한 손님 한명을 잘 접대하라고 했다는것이였다. 계월은 이제까지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비맞은 병아리처럼 떨었다.
계월이도 한규와 같은 고아였다. 신통히도 장질부사가 돌아 한규네 부모들과 누이동생이 잘못된 해에 부모식솔을 죄다 잃고 친척집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얻어먹다가 한규보다 한해 먼저 이 집에 자리잡은 계월은 그 처지의 공통성때문에 한규를 더욱 따랐고 한규 역시 그런 사정을 듣고부터는 아예 혈붙이처럼 계월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니 수상스럽기 짝이 없는 《접대》에 계월이가 불려간다는 사실을 놓고 어찌 누워만 있을수 있겠는가. 계월이로부터 《접대》방을 알아둔 그는 귀한 손님이 온다는 그바루해서 기다싶이 뒤마당에 나가 작대기 하나를 얻어들었다. 그것없이는 한걸음도 내짚기 어려운 몸이였다.
복도처럼 긴 널마루 한쪽켠의 기둥뒤에 쭈그리고 앉은 한규는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계월이가 어느 한 방에 들어가고 음식 나르는 녀인들의 발길도 멎자 주인이라는 사람은 미닫이 안쪽마루의 색전등마저 죄다 꺼버렸는데 그것으로 하여 계월이가 들어간 방을 더 잘 살필수 있었다. 붉은 색전등이 요염한 빛을 뿜는 그 방에서 계월의 노래소리가 울리고 그뒤를 이어 너털웃음과 손벽치는 소리를 들으며 한규는 장다리를 계속 꼬집어댔다. 심한 고열로 정신이 흐려지기때문이였다.
한식경도 못되여 그악을 부리는 웨침과 씩씩거리는 사내의 숨결이 흘러나왔다. 끙 하고 일떠난 한규는 제잡담 문을 열어젖히며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계월은 옷이 흐트러진채 구렝이에 감긴 병아리꼴이 되여있었고 그를 덮쳐안은 놈은 가슴팍이 온통 털부숭이인데 배꼽우의 문신을 보니 왜놈이였다. 후에 알았지만 이놈은 도경찰부장의 동생되는 오입쟁이로 북관땅의 미인들을 차례돌림으로 못 쓰게 만드는 색마였다. 놈은 그런 개짓을 하는 왈짜들이 대개 그러하듯 호신용단도까지 가지고있었다. 한규가 앓지 않을 때라면 그깐것이 무엇이랴. 작대기덕택으로 그놈을 겨우 때려눕혔다. 다행스러운것은 그때까지 주인이건 뭐건 얼씬하지 않은것이다. 이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건 꿈쩍 말라고 한 주인놈의 신칙때문이였다.
《죽었어요.》 계월이가 하는 말에 엄한규는 정신을 차렸다. 놈은 정말 죽은것 같았다. 먼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절반 사색이 된 계월을 그냥 두고 간다는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여 무작정 계월의 손을 틀어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도 없는 밤이라 천방지축 내달리다가 산길로 접어 들었다. 산을 몇개나 넘었는지 모른다. 열병도 그 길에서 뚝 떨어진듯 했으나 어느 한 산골짜기의 초가마가리에 들어서자 정신도 기운도 죄다 사라져버렸다.
나흘간을 꼬박 누워앓은 끝에 일어나보니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 며느리 내외가 함께 사는 초가마가리주인들의 인심은 후더웠으나 하루 두끼 송기죽으로 지내는 집의 군식구로 눌러살순 없었다.
어데로 가서 어떻게 살것인가.
아직도 걸음걸이가 제대로 못되여 먼길을 갈수 없는 형편이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계월이가 소리없이 사라졌다.
주인집할아버지는 계월이가 뭔가 변통을 하겠다고 떠나갔다고 했지만 한규로서는 부아가 터질 지경이였다. 역시 술집에서 치여나다나니 버릇이 잘못 붙었다고 원망도 하고 한탄도 했다.
그런데 계월이가 떠난지 닷새만에 우편배달이 편지를 가지고 나타났다. 이 집 로인의 이름으로 온 편지봉투안에는 돈 20원과 한규한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글을 모르는 계월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쓴 편지에는 병이 도지지 않는가, 다달이 돈을 부칠터이니 괴로운대로 그 집에 그냥 눌러살면서 다른 소식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였다.
한규는 울었다. 계월은 자기때문에 그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친척이라는 자의 술집에 다시 간것이였다. 사내명색에 돈과 편지를 받고 그냥 있는다는것이 죄스러워졌다. 무엇보다 그 친척이라는 자의 손에서 계월을 빼내야 한다는 생각이 불같이 앞섰다. 하여 신세막심한 집에 하직인사를 고하고 계월을 찾아떠났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도경찰부장의 동생을 중태에 빠뜨렸다는 죄명으로 한규에게 지명수배가 붙어있었다. 결국 한규는 술집어방을 에돌다가 계월이와는 만나지도 못한채 오라를 지게 되였다. 그다음 재판을 받고 청진감옥으로 가게 되였는데 재판정 증인으로 출석한 술집주인에게 계월이가 잘못되는 날에는 감옥에서 풀려나오는 길로 밟아죽이겠다고 한 말때문에 형기를 반년 넘게 더 받았다.
그때의 으름장탓인지 광복덕에 놓여나오니 그런대로 계월이가 무사한것이 기쁨으로 되였다. 한규가 역을 지고 살 때 계월이가 여러번 면회를 왔다고 했다. 면회실 창구멍으로 정성스레 담아싼 음식꾸레미를 들이밀며 눈물이 갈그랑해 부디 건강하라고 당부하는 계월의 모습은 두번 죽었다 살아나도 이 녀자와는 헤여질수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감옥에서 풀려나면 그가 설사 몸을 망쳤더라도 일생 떠받들며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였고 실지 그렇게 되여 짝을 이루었던것이다.…
《그러면 그렇겠지.》
한규의 과거사를 알게 된 마을어른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쳤다. 이로부터 한달후에 한규의 입당문제가 결정되였고(이 일때문에 세포위원장은 물론 비당원인 꼽새령감까지 군당에 찾아다녔음을 부언하게 된다.) 이듬해 봄에는 한규의 처가 쌍둥이를, 그것도 오누이를 낳았다. 그 집의 경사이자 까툴골의 경사였다.
《장끼와 까투리가 알맞춤 날겠구나.》
서당집할아버지는 이 일을 놓고 세월이 좋아가는 징조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일로 한규와 세포위원장이 당책벌을 받는 사건이 생겼다. 일인즉은 군당지도사업차로 나왔던 도당부장이라는 사람이 까툴골에 찾아든데서부터 시작되였다. 장주사의 사랑채에 당원들을 모이게 한 그는 사전료해를 어떻게 했던지 다짜고짜 《반봉건투쟁》에서의 《태공》을 놓고 억지다짐의 추상 같은 질책으로 절반 얼궈놓은 다음 매 당원들을 불러세웠다.
남녀평등권법령이 언제 나왔는데 여기선 아직까지 《녀필종부》(녀자는 남편의 노복이라는 뜻)인가. 녀자들은 남정네만 나타나면 머리를 수그리고 길까지 비켜선다는데 이런 《까막산골》이 어데 있는가. 그뿐인가. 여기 남자들도 몇살우의 사람만 보면 무릎절인지 앉은절인지 한다는데 이거야 공자, 맹자의 수제자이지 맑스, 레닌선생의 프로레타리아트라고 할수 있는가. 우리 당은 당신들과 같은 농민들도 프로레타리아투사로 되기를 바란다. 프로레타리아투사! 프로레타리아투사는 첫째도 둘째도 오직 투쟁, 투쟁만을 알아야 한다.… 도당부장이라는 사람의 말을 쥐여짜면 이것이 전부라고 할수 있다.(미리 밝혀두건대 이 부장이라는 사람은 당시 우리 도당의 요직에 잠입했던 종파분자 장순명과 단짝을 이루고있던 《얼마우제》였다.)
《그래 계속 봉건편에 설텐가?》
도당부장의 서슬푸른 물음에 다들 입을 비끄러매고있었으나 한규만은 례외였다.
《설에 세배랑 할 때두… 무릎절을 하면 안됩니까?》
《허, 이 사람이 그래 동문 계속 봉건질을 하겠다는건가?》
《봉건질이야… 그렇지만… 세배를 할 때 그냥 뻗치구 서있을수야 없지 않수꾸마.》
탕! 오동나무응접탁이 드르릉 울었다.
《동무도 당원이야? 어떻게 돼서 저런 사람이 당에 들었는가.》
부라리는 눈매가 험악스러웠다. 그와 함께 왔던 군당일군이 뭐라 말하자 시퍼렇게 질려 굳어졌던 얼굴에 차거운 비웃음이 비꼈다.
《문제가 있구만. 문제가… 동문 나가보우.》
팽팽한 긴장이 서린 가운데 엄한규가 나가자 그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 동무를 출당시키는데 찬성하는 동무들은 손을 드시오.》
너무나도 뜻밖의 사태에 다들 아연실색한 기색으로 침묵을 지키자 부장은 느닷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문제로군. 다들 싸고돈다?!… 세포위원장! 동무부터 의견을 말해보오.》
세포위원장도 절반 사색이 된 얼굴로 일어섰으나 말은 바르게 했다.
《그 동물… 출당시키는건… 리해되지 않습니다. 그 동문… 사람이 진국인데다가…》
《여보!》
또 한번 응접탁이 울었다. 세포위원장을 쏴보던 눈길이 우리에게 멎었다.
《동무들도 이 세포위원장과 같은 생각인가?》
《…》
《흠, 그러고보니 여긴 부하린도당의 소굴이구만.》

